또 다른 주된 파벌의 근원은 광범위한 개인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행사하는 해로운 영향력이다.
부자들은 항상돈을 빌려 주고, 그들의 딸을 결혼시켜 주고, 치안 판사로부터 보호해 주는 것과 같은 다른 시민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위치에 있다.
다양한 종류 이런 성격의 후원은 극히 불길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들을 공익을 희생하고 그들의 후원자로 만드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다시국민을 타락시키고 법을 위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용기를 주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부패와 약간의 자유로운 삶에 대한 적성은 도시의 불평등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그는 자주부자들의 야망, 만약에 도시를 파괴하지 않는 다양한 방법으로 도시를 파괴하지 않는 것이 곧 그녀를 파멸로 몰고 오는 것이다.
이 곤경을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잘 정비된 공화국이 재정을 풍부하게 하고 국민들을 가난하게 하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런 일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오르디니의 유형에 대해서는 다소 모호하지만, 그는 그러한 정책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혜택에 대해서는 유창하게 말한다. 이 법이 시민을 가난하게 만드는 데 사용된다면,선량함과 지혜가 없는 시민일지라도 효과적으로 스스로 부패하거나 부를 가진 다른 사람들을 막을 것이다. 공공 서비스보다 마키아벨리는 자유로운 사회가 가져올 수 있는 가장 유용한 것은 회원들을 가난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다른 사람들의 글이 많지 않았다면 가난이 부보다 훨씬 좋은 결실을 맺는다는 긴 연설로 보여 줄 수 있다는 과장된 수사적 어조로 토론을 마무리한다.
마키아벨리의 세번째 발언에서처럼 우리가 마키아벨리의 분석의 이 시점에 도달할 때쯤, 우리는 쉽게 그의 고향 도시가 그 이하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그의 일반적인 주장을 표면화한다. 그는 무엇보다도, 도시가 자유를 지키려면, 헌법이 널리 퍼져 있는 비방과 불신의 부정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어야 한다. 중립적인 시민 그리고 나서 그는 이것이 항상 우리의 플로렌스시에서 엉망으로 배치되어 왔다고 지적한다. 이 도시의 역사를 읽는 사람은 그 중요한 일에 고용된 시민들에게 얼마나 많은 비방을 퍼부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결과는 셀 수 없는 문제였으며, 이 모든 문제들은 도시의 자유를 훼손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단지아가이 요금을 부과하는 협정이라면 쉽게 피할 수 있었다. 시민들에게 압력을 가하고 한 때 비방하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것이 해결되었다.
플로렌스는 코시모 데 메디치 씨가 그의 가족의 이기적인 이익을 증진시키는 데 헌신하는 정당을 세우는 것을 막지 못하자 노예제 쪽으로 한 걸음 더 나아 갔다. 마키아벨리는 일류 시민이 자신의 부를 가지고 사람들을 타락시키려고 한다면 어떤 전략을 채택해야 하는지 보여 주었다. 원래 그랬듯이, 코시모의 경쟁자들은 그를 플로렌스에서 쫓아내기로 했고, 그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분노가 너무 심해서 결국 그를 다시 불러 공화국의 왕자로 만들었다. 공개적인 반대가 없었다면 그는 결코 출세할 수 없었을 것이다.
플로렌스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유일한 남은 기회는 메디치가가 다시 강제 추방되고 공화국이 완전히 회복된 1494년이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피에로 소데리니의 감독 아래 새로운 지도자들은 마키아벨리가 주장한 정책을 채택하지 않음으로써 가장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이런 정권의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말이다. 고대 역사를 읽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폭정에서 공화국으로 운동이 이루어지면 브루투스의 아들들을 죽이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소데리니는 그는 사악한 파벌을 없앨 수 있다며 인내심과 선량함으로 브루투스의 아들들의 열망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피를 흘리지 말고 몇몇 사람들의 적대감을 해소하라고 보상하라. 이러한 충격적인 빈곤의 결과는 브루투스 즉 메디치 가문의 일원인 브루투스의 아들들이 그를 파괴하고 15년 후 메디케아 폭정을 회복하기 위해 생존했다.
소데리니는 마키아벨리의 중심 교훈을 실천하는 데 실패했다. 그는 좋은 일이 생기면 나쁜 짓을 하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을 하기 위해서는 불법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에 적들을 무너뜨리기를 거부했다. 그가 인식하지 못한 것은 도시의 자유가 정말 위험에 처해 있을 때 그러한 양심의 가책에 굴복하는 어리석음이었다. 그는 그의 작품과 의도가 그들의 결과에 의해 판단될 것이다. 그리고 행운과 삶이 그와 함께라면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가 한 것이 그의 야망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고향의 보존 그랬던 것처럼, 그가 브라운처럼 될 만한 지혜를 갖지 못한 결과는 가능한 한 비참했다. 그는 지위와 평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도시와 도시의 자유를 잃고, 시민들을 노예가 되게 하였다. 그의 세번째 발언처럼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결국 지도자와 그가 섬긴 정부에 대한 격렬한 비난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르네상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키아벨리 26, 스파르타의 최초의 창시자인 리쿠르거스의 사례 (0) | 2025.05.06 |
---|---|
마키아벨리 31,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대포에 의존 (0) | 2025.05.06 |
마키아벨리 30, 제국 원정 (0) | 2025.05.04 |
마키아벨리 28, 이전 정권으로부터 이익을 얻은 사람들 (0) | 2025.05.03 |
마키아벨리 27, 플로렌스의 공화 사상의 전통에 역행 (0) | 2025.05.03 |